조선왕조 5개 궁궐 투어
투어 일자 : 2022년 8월 7일(일)
투어 구간 : 시청역-덕수궁-서울시립미술관-정동길-돈의문터-경희궁-서울역사박물관-광화문광장-경복궁-청와대-삼청로-북촌-창덕궁 돈화문-광장시장-창경궁-창덕궁-비원-창덕궁 돈화문
함께한 이 : 왼발, 오른발 부부
어제에 이어 오늘도 고온다습이 극에 달한다.
오늘은 뭐 할까??? 산이나 갈까??? 그냥 집 에어컨에게 기대???
아침을 먹고 난 후 고민고민
어제 8월 6일 광화문광장이 새롭게 재개장을 했다.
점심거리도 해결 할 겸
종로로 나가 보기로 한다.
그냥 가면 심심하니
조선왕조 5대 고궁이나 걸어 볼까???
어라~ 옆지기가 자기도 따라 나가겠단다.
그때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얼마나 힘든 고행길이 기다리고 있음을~
간단하게 반바지, 샌들 차림으로 우산만 하나 챙겨 집을 나선다.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역사박물관
덕수궁 중화전
덕수궁 중명전
경희궁 숭정전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경회루
청와대
(1) 덕수궁
시청역 1번, 또는 2번 출구로 나와 덕수궁으로 향한다. 2번 출구가 더 가깝다.
현재 대한문 월대 복원 공사로 인하여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다.
대한문 大漢門 (大漢 : 한양이 창대해진다) 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쪽으로 난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환구단 건립 등으로 경운궁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삼았습니다. 1906년에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70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서쪽으로 물러 앉게 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대한문을 지나 건너게 되는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 복원한 것입니다.
가림막 뒤편 대한문을 통과한다. 우리는 고궁을 한번에 모두 관람할 수 있는 통합권을 구입했다.
궁궐통합관람권, 유효기간 구입일로부터 3개월, 10,000원에 구입한다. 경희궁은 무료관람이고, 나머지 궁궐은 각 입장료가 다르다. 이것 통합권을 구입할 경우 종묘까지 5곳을 이용할 수 있고, 창덕궁 비원(입장료 5,000원)까지 함께 관람할 수 있으니 가능하면 통합권 구입을 권유하고 싶다.
광명문 光明門 (光明 : 밝음을 맞다) 광명문은 고종의 침전이었던 함녕전의 남쪽 대문이다. 1904년 화재 이후 중건되었다가 1930년대에 석조선 서관 남쪽으로 옮겨졌고 그 안에 보루각 자격루와 흥천사 동종 등의 문화재를 전시하였다. 2018년 80여 년 만에 제자리를 찾아 함녕전 남쪽으로 옮기고 없어졌던 문과 잡상 등을 복원하였다. 현재 보루각 자격루와 흥천사 동종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 중이다.
중화문 中和門 (中和 :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 1902년에 건립된 중화전의 정문으로 1904년 덕수궁 대화재로 소실된 후 새로 만들어 세웠으며, 본래 중화문 좌우에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동측에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중화전 中和殿 (中和 :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습니다. 본래는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습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습니다. 특히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중화전 좌측 뒤쪽으로 덕홍전, 함녕전이 있으며, 서울특별시청사가 함께 조망된다.
광명문을 통하여 들어가게 되는 덕홍전, 함녕전이다.
덕홍전(좌, 바깥쪽)과 함녕전(우,안쪽)을 당겨 본다.
석어당 昔御堂 (昔御 : 옛날에 임어(臨御)하였다) 석어당의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습니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9월 현판을 걸어 완전히 중건하였습니다. 덕수궁의 유일한 중층의 목조 건물로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로 피난갔다 환도한 후 거처하셨던 곳이자 1608년 2월 승하한 곳으로 추정됩니다. 이 밖에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시켰던 곳,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석어당은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건물입니다. 석어당 주련 海屋籌添壽八百(해옥주첨수일백) : 해옥(海屋)에 산가지 더하니 수명은 팔백 세요. 瑤池桃熟歲三千(요지도숙세삼천) : 요지(瑤池)에 복숭아 익으니 나이는 삼천 년일세.
준명당(좌)과 즉조당(우)
준명당(좌), 즉조당(중앙), 석어당(우)을 함께 담아 본다.
석어당 앞 살구나무
덕수궁에서 가장 오래된 살구나무라고 되어 있다.
중화전 뒤쪽 모습이다.
준명당(좌)과 즉조당(우), 준명당 浚眀堂 (浚明 : 다스려 밝힌다) 이 건물은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04년 화재 때에 소실되었으며,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8월 현판을 걸어 중건하였습니다. 목조 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종께서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고, 정면 6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좌우 툇간에는 쪽마루가 있습니다. 이후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한 유치원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준명당 주련 三百六旬春不老(삼백육순춘불로) : 삼백육십일 늘 봄처럼 늙지 않고 萬八千年慶長留(만팔천년경장류) : 일만 팔천 년 동안 경사가 길이 머무리.즉조당 卽阼堂 (卽阼 : 즉위(卽位))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이 건물은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97년 고종의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직후 정전으로 이용하였으며, 이때 즉조전의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렀습니다. 이후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자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에 소실되었던 즉조당은 그 해에 석어당, 준명당과 함께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9월 현판을 걸어 완전히 중건하였습니다. 이 곳은 고종의 후비인 순헌황귀비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생활하던 공간이기도 하며,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조당 주련 九天閶闔開宮殿(구천창합개궁전) : 구천의 큰 문이 이 궁전에서 열리니 萬國衣冠拜冕旒(만국의관배면류) : 만국의 사신들이 면류관에 절하네. 文德武功▨▨▨(문덕무공▨▨▨) : 문덕(文德)과 무공(武功)은 … 龜圖龍曆天休大(귀도용력천휴대) : 귀도(龜圖)와 용력(龍曆)을 받으니 하늘의 복이 크도다 月入花庭光靜氣爽(월입화정 광정기상) : 달이 꽃 뜨락을 비추니 빛이 고요하고 기운이 상쾌하도다
석조전 서관 石造殿 西館 1936년 8월 기공하여 1938년 6월에 준공하였으며 이왕가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우측에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역사박물관
해시계를 관찰하고 계신다.
베롱나무와 석조전을 배경으로
석조전 石造殿 (石造 : 돌로 짓다) 조선시대 궁중건물 중 대표적인 유럽풍의 석조 건축물로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고, 1900년 기공되어 1910년에 준공되었다. 고종은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는 현대미술품을 진열하였으며, 1946년~1947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1948년~1950년에는 유엔 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2009년 문화재청에서 석조전을 1910년 준공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 공사를 진행하여 2014년에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석조전 서관
등나무 쉼터 아래를 걸어 본다.
등나무 아래에서 조망되는 석조전,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다시 중화전을 지나 덕홍전, 함녕전으로 간다.
석어당 옆 살구나무
옆지기님께서는 배지를 찾아 이동중이시다.
석어당과 살구나무
아름다운 담장이다.
덕홍전(좌)과 함녕전(우)
덕홍전 德弘殿 (德弘 : 덕이 넓고 크다) 함녕전을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할 때 일반 빈객들을 접견하기 위하여 1906년 건립한 후 1911년에 개조한 전각으로 주로 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건물로 측면에는 좌우 툇간이 있어서 전체의 평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 덕홍전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 일부만 함녕전 남행각에 연접되어 있습니다.
함녕전
함녕전 咸寧殿 (咸寧 : 모두가 평안하다) 1897년 건립된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되었으나, 1904년 함녕전 온돌 수리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함녕전은 이듬해인 1905년 8월에 중건하였습니다. 이 곳은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중화전(좌)과 덕홍전(우) 측면부 모습이다.
석어당과 살구나무
덕홍전과 함녕전 뒤쪽에 위치한 정관헌으로 이동한다.
아름다운 담장을 따라 이동한다.
아치형의 아름다운 문을 넘어 정관헌으로 들어 간다.
정관헌 靜觀軒 (靜觀 : 고요히 바라보다) 정관헌은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로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전각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동양식이며, 건물은 차양칸과 난간을 서양식처럼 꾸몄습니다. 또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대한문 입구 우측에 위치한 연못으로 물이 흘러들고 있다.
대한문을 다시 나와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향한다.
덕수궁 월곡문 앞에 있는 조형물이다. 아침 출근길 시청역에 일부러 내려 경복궁역까지 도보로 운동삼아 자주 이 길을 걷는다.
정동로터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들어선다.
시원한 그늘길을 걸어 본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오늘까지 전시회 무료관람이라서 입장을 기다리는 대기줄이 장난이 아니게 길다. 우리는 그냥 포기하고 돌아선다.
다시 정동제일교회 앞을 지나 이제는 정동길을 걷는다.
정동길이다.
국립정동극장 앞을 지난다.
국립정동극장 좌측 좁은 골목 안쪽에 덕수궁 중명전이 자리하고 있다.
중명전으로 들어가 본다. 이곳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중명전 重眀殿 (重眀 :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다) 1897년 황실의 도서와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의 황실 도서관으로 계획되어 1899년 준공되었다. 한성부 건축기사로 초빙된 미국인 다이(J. H. Dye)의 설계로 1층 서양식 건물로 지어졌다. 1901년 11월 화재로 전소되어 이듬해 회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재건축되었다. 처음에는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렸으나, 1906년경부터 중명전重明殿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904년 4월 고종이 이곳으로 이어하면서 편전 겸 폐현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이듬해인 1905년 이곳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중명전은 외국인클럽 등 민간 영역에서 활용되면서 내외부가 많이 변형되었다. 2009년까지 문화재청에서는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실내를 전시장으로 개비하여 2010년부터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명전을 나와 다시 정동길 따라 돈의문(서대문)터 사거리로 진행한다.
정동길에 있는 보호수 회화나무
돈의문터 사거리에 도착한다.
횡단보도를 건너 돈의문박물관마을로 올라선다.
돈의문박물관마을
옛날의 골목을 재현해 두었다.
삼거리이용원을 들어가 본다. 예약제로 실제 이발도 해 주고 있다.
시원한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고 있다. 잠깐의 청량함을 느껴 본다.
알까기 금지, 바둑판도 놓여 있다.
여보세요??? 여기는 미장원이 아니고, 이용원인데요!!!! 이발 하시게요???
나이가 많은 의자 입니다.
(2)경희궁
사적인 경희궁은 새문안 대궐 또는 서쪽의 궁궐이라 해서 서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 후 왕족의 사저로 쓰이다가 광해군 8년(1616)에 이 새문안 대궐 자리에 왕기(王氣)가 있어 이를 눌러 없애기 위해 별궁을 짓고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축출되었으며 영조 36년(1760)에는 궁의 이름을 경희궁이라 개칭하였다. 경희궁에는 회상전, 흥정당, 집경당, 숭정전, 흥화문 등의 건축물이 있었으나, 순조 29년(1829)에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어 1831년에 중건하였다. 국권침탈 뒤에 건물은 없어지고 그 터에 경성중학교(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세워졌으며 1987년 서울고교가 강남으로 이전한 뒤 공원으로 가꾸었다. 공원 내에는 서울시립미술관, 산책길 등이 있고 신라호텔로 옮겼던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 다시 제자리에 옮겨졌으며, 정전인 숭정전의 복원작업이 1994년 11월에 완료되었다.
경희궁 흥화문으로 들어선다.
점심 시간 산책코스로 자주 들르는 곳이다.
경희궁 숭정문 뒤로 인왕산이 버티고 있다.
좌측에 서울특별시교육청이다.
경희궁 숭정문으로 들어선다.
경희궁 숭정문
숭정문 우측 아래에 경희궁지 안내판
숭정문에 올라 흥화문 방향으로 조망해 본다.
경희궁 숭정전
옆지기님께서 무엇을 열심히 들여다 보고 계십니다. 저기~ 사진 찍게 비켜주시면 안될까여???
숭정전에서 조망되는 시내, 고층 건물들이 가로 막고 있다.
숭정전 뒤쪽 자정전으로 향한다.
자정문을 올라 자정전으로 들어간다.
경희궁 자정전
자정전과 태령전 뒤쪽에 있는 서암으로 나가 본다.
서암에서 바라보는 자정전
경희궁 태령전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던 곳이라고 한다.
숭정전으로 되돌아 와 숭정문을 조망한다.
이제 경희궁을 나와 서울역사박물관 방향으로 내려간다.
종로구 아름다운 나무
볼수록 특이하게 생겼다.
위 느티나무 뒤로 경희궁 숭정문이다.
서울역사박물관 한켠에 옛전 광화문을 해체하였던 자재를 전시해 두었다. 나무가 아닌 콘크리트로 광화문을 만들었던 것이다.
콘크리트로 나무처럼 만들 수 있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서울역사박물관
흥화문터를 지나는데, 집에 있는 애들에게서 연락이 온다. 자기들이 2시까지 광장시장으로 갈건데 올거냐고??? 뭐지??? 와서 밥 사라는 통보를 해온 것이다. 부부만 진행하면 여유롭게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정이 바빠진다.
흥화문터, 이곳이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의 원래자리였다고 한다.
광화문사거리로 이동해 간다. 옆지기는 신발이 발에 맞지 않는지, 상처가 생겨 근처 약국에서 밴드를 구입해서 임시처방을 한다. 그러나 끝까지 신발이 말성이다. 이미 날씨는 최고를 향해 오르고 있다. 온몸이 땀범벅인 것은 어쩔 수 없다치더라도 발이라도 편해야 하는데~ 에궁~~
광화문역 7번출구가 바로 광화문광장으로 연결된다.
광화문광장
광화문광장 주요 장소
언제 봐도 늠름한 이순신장군상이다.
2022년 8월 6일 광황문광장이 재조성되어 새롭게 재개장을 했다. 아들의 천국이다.
광장은 구름이 끼어 있다고는 하지만 후덥지근이 절정에 달한다.
어제 행사를 했던 무대를 철거중에 있다.
시원하세요???
좌측 세종문화회관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갖가지 공연도 펼쳐지고 있고
세종대왕상을 지난다.
역사 연대기로 물줄기를 만들어 흐르게 해놨다.
우측으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문화재발굴지는 그대로 보전해 관람을 할 수 있게 해 두었다.
금강송도 옮겨 식재되어 있다.
광화문으로 이동한다.
정부서울청사
(3)경복궁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도 덕수궁 대한문 월대 복원공사처럼 월대공사를 진행중이다.
광화문光化門 - 光化 : 군주에 의한 덕화(德化),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조선의 법궁에 해당하는 궁궐의 정문으로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서 마치 성곽의 성문과 같은 격식으로 장대하게 지어졌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이 세 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문으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문으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또한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두어 시각을 알리는데 사용하였다.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다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1968년에 경복궁 정문의 위치로 다시 옮겼으나 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위치 또한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또한, 광화문 홍예 개판에는 ‘사령(四靈)’ 인 기린, 봉황, 거북이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1968년 광화문 복원시 그려진 것을 현황 모사한 것이다.
경복궁 관람코스 안내도
경복궁 40분 관람코스
경복궁 60분 관람코스
경복궁 90분 관람코스
흥례문(興禮門 - 興禮 : 예를 일으킨다) 일곽의 가운데에는 백악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물 즉, 금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도록 한 어구가 있고, 어구의 중앙에 영제교(永濟橋)라는 다리가 놓여 있다. 어구(御溝)는 경복궁 뿐만 아니라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에도 있으며, 고려궁궐, 중국의 궁궐, 베트남의 궁궐에도 있어 동아시아 지역의 궁궐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구와 영제교는 근정문(勤政門 - 勤政 : 정치를 부지런히 함)에서 이루어지는 왕과 신하들의 조회 시에 신하들이 도열할 위치를 구별하는 경계이기도 했다.
흥례문과 좌우행각
이곳도 별도 매표를 해야 한다.
영제교 남쪽에서 바라본 근정문(勤政門 - 勤政 : 정치를 부지런히 함) 근정문에서는 왕과 문무백관이 조참의식(소조회)를 행하였다. 또는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는 데, 단종은 근정문에서 즉위를 한 첫 번째 왕이다. 근정문에서 의례를 거행할 때는 영제교의 북쪽으로 정2품 이상이 서고, 남쪽으로는 정3품 이하가 자리를 잡았다. 영제교를 중심으로 북쪽에 2품 이상의 관원이 서고, 남쪽에 3품 이하의 관원이 정렬하였다. 흥례문 행각의 서북쪽에는 서쪽 궐내각사와 빈청으로 출입하는 유화문이 자리하고 있다. 흥례문 일곽에서는 조회뿐만 아니라 국문이나 교서반포 등이 이루어졌으므로, 궐내각사와 빈청의 관원들이 원활히 움직일 수 있는 문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유화문(維和門 - 維和 : 維는 어조사, 和는 온화함)이 한 것이다.
어구 _ 경복궁의 금천
금천을 지키는 천록
근정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근정문을 통과해야 한다.
경복궁 근정문
국보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 영역에서는 조하를 거행하고 외국사신을 맞이하는 국가의 중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근정전(勤政殿-勤政 : 정치를 부지런히 함)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이다. 왕이 신하들의 조하(朝賀:조회의식)를 받거나 공식적인 대례(大禮) 또는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정전인 근정전은 궁궐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면적도 가장 넓게 차지하고 있다. 중층으로 된 근정전 건물은 2단의 높은 월대(月臺)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중요행사를 치룰 수 있는 넓은마당이 있고, 그 둘레를 행각이 감싸고 있다.
수정전, 외국인들이 한복을 입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경회루 연지 남쪽에 위치한 수정전은 세종대에 집현전이 위치한 궐내각사지역에 고종대에 새로 지은 전각이다. 고종대 초기에는 임시로 편전의 역할도 하였으며, 1894년 갑오개혁 당시 내각 본부인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다.
2년여간의 코로나로 인해 외국인들이 뜸했던 경복궁에 다시 외국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국보 경복궁 경회루(慶會樓 - 慶會 : 경사스러운 연회) 침전인 강녕전 서쪽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으로 외국사신 또는 군신간의 연회장소이며, 임금은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만 정사를 바로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경사스러운 모임이 있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경회루는 침전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 외국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경복궁 창건 당시는 작은 누각이었던 것을 태종 12년(1412)에 크게 연못을 파고 지금과 같은 규모로 만들었다. 그 후 성종 때 건물이 기울어져 다시 고쳐 지었는데 돌기둥에 용과 꽃 장식을 하여 화려하게 치장하고, 연산군 때에는 연못 안 인공섬에 만세산을 조성하고, 그 곳에 월궁을 꾸며 조화를 장식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경회루건물은 없어졌지만,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연못은 나라에 가뭄이 들 때마다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경회루에서 곧장 향원정으로 향한다. 애들과 점심 약속으로 갑자기 일정이 바빠진다.
보물 경복궁 향원정(香遠亭 - 香遠 : 향기가 멀리 간다)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 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향원정은 1873년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연못 가운데에 섬을 만들어 2층의 육모지붕을 얹은 정자이다. 향원정으로 가는 섬에는 나무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취향교라 하였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 집옥재, 협길당, 팔우정 이 3채의 건물은 당초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이 전각들도 옮겨온 것이다. 고종은 이 건물들을 어진의 봉안 장소와 서재 겸 외국사신 접견장으로 사용(1893년 한 해에만 영국, 일본, 오스트리아 등 외국 공사들을 다섯 차례 접견)하였다.이 3채의 건물은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신식이라고 생각되던 중국풍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집옥재(集玉齋 - 集玉 : 보배를 모으다)의 현판을 송나라 명필인 미불(米連, 字 元章)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중국풍으로 만든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집옥재 뒤쪽 신무문으로 곧장 나가면 청와대 앞길로 이어진다.
신무문神武門 - 神武 : ’뛰어난 무용(武勇)‘ ’신령스러운 현무(玄武)‘ 신무문은 궁성의 북쪽 문으로 북쪽 궁성이 마련되고 나서 세워진 것이다. 신무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성종 6년(1475)이다. 신무문 쪽은 인적이 드물었으나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해 놓은 회맹단이 있어 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이 있는 회맹제에 참석할 때에는 이 문을 이용하였다. 또 영조 때에는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에 참배하기 위하여 경복궁터를 길로 삼았는데, 이때 신무문을 자주 이용하였다. 신무문은 건춘문과 규모가 동일하며 현재의 문은 경복궁 중건 시 건립된 것이다.
신무문
신무문을 나서면 곧장 청와대 정문이다.
청와대, 수 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린다. 무분별한 개방으로 문화재 훼손이 심히 걱정이 되는 부분이다.
청와대 앞 경복궁 담장을 따라 춘추문 방향으로 이동한다.
청와대 춘추문
춘추문에서 북촌을 지나 창덕궁으로 가기 위해 삼청동길 따라 걷는다.
삼청동 총리공관앞을 지나고
삼청동에서 북촌으로 올라서기 위해 비좁고 가파른 돌계단길을 올라선다.
북촌마을로 올라선 후 춘추문 방향으로 인왕산을 조망해 본다.
북촌마을 대표적인 포토존이다.
북촌길
능소화가 담장에 얹혀 있다.
헌법재판소 사거리에서 좌측 창덕궁 방향으로 진행한다.
드디어 창덕궁이 보인다.
돈화문(敦化門)-敦化 : 교화를 돈독하게 한다. 규모와 품위를 함께 갖춘, 창덕궁의 정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1609년에 재건되었다.
현재 13:07, 애들과 14:00 광장시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창덕궁 후원 탐방가능 시간은 14:00부터 약 70분간이라고 한다. 약속 때문에 일단 창덕궁 입장은 보류하고 광장시장으로 향한다.
단봉문을 지나고
이곳은 공사차량이 출입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일제시대때 단절되었던 창경궁에서 종묘로 이어지던 길을 최근에 다시 복원을 했다. 율곡로 터널 상단부로 그 길이 새로이 연결되었다. 저 위로 올라선 후 광장시장으로 갈 것이다.
좌측의 소공원으로 진입한다. 아주 예전에 이곳이 주차장이었는데~
율곡로 터널 상단부로 올라섰다.
단절된 좌측의 옛 성곽길 흔적과 새롭게 조성된 담장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다시 맥을 이어가는 것이다.
좌측 철대문 안쪽으로 진행한다.
창경궁과 종묘 역사복원 사업 안내문
무더위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종묘 북쪽 담장 유구(1)
뒤돌아 본다.
담장길 따라 북신문으로 내려선다.
북신문, 이곳에서 종묘로 바로 들어갈 수 있지만 현재는 잠겨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담장길 따라 계속 걷게 된다.
종묘 옛 지형 복원으로 찾은 새김돌
간지를 새겨 개축 연도를 표기해 둔 것이라고 한다.
터널 반대편으로 내려선다.
이현궁터를 지나 혜화경찰서 앞을 지난다.
13:40 광장시장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이후 일정을 생각해 봐야 한다. 일단을 잘 먹인 후에~
오전 일정은 여기까지 진행한다. 창덕궁, 창경궁 진행 여부는 잠시 후 결정나게 된다.
조선왕조 5궁궐 투어는 제2편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