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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일상속으로

조선왕조 궁궐 투어(덕수궁,경희궁,경복궁,창경궁,창덕궁) 2

조선왕조 궁궐 투어 제2편

 

투어 일시 : 2022년 8월 7일(일)

투어 장소 : 시청역-덕수궁-정동길-경희궁-광화문광장-경복궁-청와대길-삼청길-북촌-창덕궁 돈화문-광장시장-창경궁-창덕궁-비원-창덕궁 돈화문

함께한 이 : 왼발, 오른발 부부, 딸들과 함께

 

광장시장에서 점심 식사를 하면서 여러가지 의견이 나왔다.

그냥 집에 가자는 옆지기

애들은 카페 등 다른 곳을 가자는 의견

나는 마저 끝내면 어떻겠느냐는 의견

모두 걷는것 빼고는 괜찮다는 의견으로 몰아 간다.

 

일단 배불리 먹인다.

창경궁에 가면 시원한 그늘에 카페가 있지 않을까???? 미끼를 던져 본다.

어차피 주변은 시장 구경거리 아니면 볼게 없지 않느냐

버스를 타면 창경궁 입구까지 쉽게 갈 수 있음을 고지한다.

그래 가자~

고고~

 

창경궁 통명전
낙선재
창덕궁 인정전


(4)창경궁

홍화문(弘化門) (보물)창경궁의 정문으로 홍화(弘化)는 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 8)에 재건된 건물이다. 홍화문은 국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에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고, <홍화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 라는 기록화에 그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버스를 내린 후 서울대병원을 가로질러 창경궁으로 걸어 왔다.
이곳에서 애들만 따로 입장권을 구매한다.
후원 관람을 문의하니, 일단 함양문 창덕궁(후원) 입구 쪽으로 가서 창덕궁 후원 관람일정을 확인해 봐야 한다고 하니, 일단 창경궁 입장 후 곧바로 함양문(후문)쪽으로 이동한다.
홍화문을 들어서자 명정문이 공사중에 있다.
창경궁, 홍화문 표지석, 홍화문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옥천교(玉川橋) (보물)를 지나 명정문으로 들어갈 수 있으나, 현재 공사중이다. 명정문(明政門) 및 행각(行閣) (보물), 명정문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행각을 어느 정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둘러싸인 명정전의 중정(中庭)은 정확한 방형이 아니고 기울어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다포계 건물인데, 잘 다듬은 원형 주초석 위에 중앙열의 주열(柱列)에는 각 칸마다 2매씩의 육중한 판문을 달아 안으로 열리게 하였다. 이 건물은 포작(包作)과 건축의 형식으로 보아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명정전(明政殿) (국보),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正殿)으로, 명정(明政)이란 정사를 밝힌다라는 뜻이다.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장소이다. 인종이 1544년(중종 39)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1759년(영조 35) 6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또는 가례(嘉禮))가 치러지기도 했다. 1484년(성종 15)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니, 현존하는 조선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이 중층 규모로 거대하게 지어진 것에 비해 명정전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이는 애초에 창경궁이 정치를 위해 지은 궁궐이 아니라 왕대비 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 때문이다. 앞쪽에 펼쳐진 마당, 즉 조정(朝廷)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다. 정전 마당 양옆에 늘어선 돌들은 품계석이라 하는데, 행사 때 문무백관들이 품계석에 새겨진 각자의 품계에 맞춰 국왕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무신, 좌측에는 문신이 선다. 또한 삼도 가운데 중앙에 있는 어도는 국왕이 이동하는 길이었다. 명정전으로 오르는 계단 가운데 있는 경사진 돌을 답도라 하는데 그 위로 국왕이 탄 가마가 지나갔다. 명정전 건물 내부에는 국왕이 앉았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병이라는 병풍이 있다. 해와 달은 국왕과 왕비 또는 양과 음을 상징하고, 다섯 봉우리의 산은 전국의 오악 또는 오행을 상징하여, 국왕과 왕비가 전국토를 잘 다스림을 뜻한다고 한다. 명정전 앞 양 옆에는 드므라 불리는 큰 청동그릇이 있다. 드므에는 물을 가득 담아두어 화재예방의 의미가 있지만, 화마가 불을 지르러 왔다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놀라서 달아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늘 우리는 창덕궁 후원 관람예약을 위해 명정전은 패스하고 우측 출구로 나가 함양문으로 진행한다.
좌측 통명전 방향으로 진행한다.
일제시대에 이런 곳을 동물원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창덕궁 방향 진행이다.
우측에 영춘헌과 집복현이 있다.
좌측 함인정 앞쪽에 석탑이 있다.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영춘헌은 봄을 맞는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이 건물들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830년(순조 30)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순조 34)에 재건되었다. 집복헌은 1735년(영조 11) 1월에 사도세자, 1790년(정조 14)에 6월 순조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영춘헌은 정조가 즉위 후 자주 머물렀던 장소이자 1800년 49세의 나이로 승하한 곳이다. 정조는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 하였다.
영춘헌과 집복헌
전방의 양화당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영춘헌과 양화당 사이에 커다란 암반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양화당(養和堂), 통명전 옆의 양화당은 조화로움을 기른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내전의 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인조가 병자호란 후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렀다. 이후 인조는 청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곳은 25대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 김씨가 간병을 받다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양화당은 1830년(순조 30)화재로 불탄 것을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이다.
양화당 우측의 계단을 따라 오르면 성종태실과 성종비태실이 있는 곳이다.
양화당
양화당 정면
양화당을 지나 통명전으로 간다.
통명전(通明殿) (보물),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통달하여 밝다라는 뜻이며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통명전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월대 위에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넙적한 박석을 깔았다.이곳에서는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다. 1694년 (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희빈으로 강등된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파묻었다.희빈 장씨는 이로 인하여 사약을 받게 되고, 희빈 장씨의 시신은 정문인 홍화문 남쪽에 있는 선인문을 통해 나가게 된다.통명전 뒤뜰에는 샘이 있는데, 1757년(영조 33)에 샘물이 맵도록 차다고 하여 열천(冽泉)이라 하였다. 통명전 서쪽의 연지는 샘이 마당으로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1485년(성종 16)만들었다.
통명전을 지나
함양문 방향 계단길을 오른다.


(5)창덕궁

 

15:32 함양문(창덕궁(후원)연결 입구), 창덕궁 후원 관람은 16:00부터 진행된다고 한다. 아직 시간이 있어 화장실도 다녀 올 겸 낙선재로 내려간다.


창덕궁 낙선재

 

창덕궁 낙선재

 

낙선재로 들어선다.
우측에 상량정
낙선재(樂善齋)-樂善 : 선(善)을 즐긴다 헌종의 검소한 면모가 느껴지는 곳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
낙선재 뒤로 상량정이다.
낙선재 정면
낙선재 현판
상량정
다시 창덕궁 희정당 앞으로 되돌아 온다. 옆지기와 애들은 그늘에 쉬고, 나 홀로 돌아 다닌다.
인정전이 보이고
희정당(熙政堂)-熙政 : 화락한 정치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곳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궁궐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동궐도> 에 그려진 원래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이 모습과 완전히 다르고, 원래의 강녕전과도 다르다.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유리 창문,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희정당 정면
인정전으로 가기 전 선정문을 지난다.
선정문, 선정전 (宣政殿)- 宣政 : 정교(政敎)를 선양(宣揚)한다. 임금의 집무실로 쓰인 곳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세미나격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이곳을 혼전(魂殿,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인정전(仁政殿)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곳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궁궐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 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문 밖 외행각(外行閣)에는 호위청과 상서원 등 여러 관청들을 두었다. 1405년(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 2)에 재건,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외행각 일원은 1991년 이후에 복원했다.
인정문(仁政門)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천장은 천장 재료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단청은 가장 소박하게 꾸몄다.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되던 곳으로,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다시 희정당 방향 함양문으로 간다.


창덕궁 후원

 

16:00 후원 입구
후원은 개인 5,000원의 별도 요금을 내야 한다. 창덕궁/창경궁 입장료와 별도이다. 통합권에는 후원 입장료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곳에 안내책자가 비치되어 있다.
남산타워를 당겨 본다.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단체로 이동을 한다. 후원 관람은 개별 관람이 되지 않는다.
이 더운 날씨에 아빠는 애를 업고 함께 한다. 우리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못이라고 불리는 창덕궁 후원 부용지로 내려선다.

 

해설사님의 설명이 이어지고
어수문(앞)과 주합루(중앙), 서향각(좌)
부용지
우측에 있는 영화당
어수문
부용정(芙蓉亭)-芙蓉 : 연꽃, 휴식과 학문적 용도로 쓰인 아름다운 건물들 이곳은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으로, 휴식뿐 아니라 학문과 교육을 하던 비교적 공개된 장소였다. 300평(약 1000㎡) 넓이의 사각형 연못인 부용지를 중심으로 여러 건물을 지었다. 주합루 일원의 규장각(奎章閣)과 서향각(書香閣) 등은 왕실 도서관 용도로 쓰였고, 영화당(暎花堂)에서는 왕이 입회하는 특별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영화당은 동쪽으로 춘당대 마당을, 서쪽으로 부용지를 마주하며 앞뒤에 툇마루를 둔 특이한 건물이다.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의 부용정은 연못에 피어 있는 한송이 꽃의 형상을 하고 있다. 행사가 치러지던 영화당은 연못에 면해 있으며, 학문을 연마하던 주합루는 높은 곳에서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다. 하나하나의 건물도 각각 특색 있고 아름답지만, 서로 어우러지면서 풍경이 되는 절묘한 경관이다. 현재는 어수문을 중심으로 생울타리인 취병을 재현하여 지역을 구분하고 있다.
영화당 앞 마당이다.
50인 이상 단체관람이기 때문에 마스크 착용은 필수다. 거의 죽음이다.
아름다운 정원이다.
부용지와 부용정
왕은 중앙 어수문을 이용하고, 신하들은 좌우측 작은문을 이용하여 출입하였다고 한다.
주합루
영화당 정면
연경당 방향으로 이동한다.
영화당을 뒤 돌아 본다.
의두합
불로문(不老門), 애련지(愛蓮池)-不老 :늙지 않는다, 愛蓮 : 연꽃을 사랑한다. 군자의 성품을 닮은 경치 1692년(숙종 18)에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섬은 없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걸쳐 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했던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새 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혀 놓았다. 애련지 서쪽 연경당 사이에 또 하나의 연못이 있는데, 원래 이곳에 어수당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1827년(순조 27) 효명세자는 애련지 남쪽에 의두합을 비롯한 몇 개의 건물을 짓고 담장을 쌓았다. 현재 기오헌(奇傲軒)이라는 현판이 붙은 의두합은 8칸 의 단출한 서재로, 단청도 없는 매우 소박한 건물이다. 바로 옆의 운경거(韻磬居)로 추정되는 건물은 궐 안에서 가장 작은 한 칸 반짜리 건물이다.
애련지
애련지 애련정
불로문을 들어서면
애련지의 애련정이 함께 들어 오고
연경당으로 곧장 갈 수 있으나, 출입이 막혀 있다.
불로문을 다시 나간다.
다시 애련지를 지나 진행하면
창덕궁 뽕나무가 있고
관람정이 있는 연못의 커다란 밤나무 가지가 꺽여 버렸다.
관람정, 존덕정, 펌우사가 함께 조망된다.
관람정
존덕정(尊德亭)과 폄우사 - 어리석은 자에게 돌침을 놓아 깨우쳐 경계한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권면하는 말,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 이 일대는 후원 가운데 가장 늦게 갖춰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모습은 네모나거나 둥근 3개의 작은 연못들이 있었는데, 1900년대 이후 하나의 곡선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관람지라고 부른다. 연못을 중심으로 겹지붕의 육각형 정자인 존덕정,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觀纜亭), 서쪽 언덕 위에 위치한 길쭉한 맞배지붕의 폄우사(砭愚榭), 관람정 맞은편의 승재정(勝在亭)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들을 세웠다. 폄우사는 원래 부속채가 딸린 ㄱ자 모양이었으나 지금은 부속채가 없어져 단출한 모습이고, 숲 속에 자리 잡은 승재정은 사모지붕의 날렵한 모습이다. 1644년(인조 22)에 세워진 존덕정이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관람정과 승재정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존덕정
존덕정과 은행나무
은행나무
펌우사
좌측에 있는 승재정
마지막 관람이라서 안내직원이 열려 있던 창문들을 닫고 있다.
펌우사(좌)와 존덕정(우)
연경당(演慶堂)과 선향재(善香齋)- 演慶 : 경사(慶事)가 널리 퍼진다, 善香 : 좋은 향기가 서린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뜬 조선 후기 접견실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1828년(순조 28)경에 창건했다. 지금의 연경당은 고종이 1865년쯤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사대부 살림집을 본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단청을 하지 않았다.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는 연결되어있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일반 민가가 99칸으로 규모가 제한된 데 비해, 연경당은 120여 칸이어서 차이가 난다. 서재인 선향재(善香齋)는 청나라풍 벽돌을 사용하였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래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후원 높은 곳에 있는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안채 뒤편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반빗간이 있다. 고종 이후 연경당은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태일문
선향재
우신문을 통해 사랑채로 들어갈 수 있다.
연경당 선향재 뒤쪽 농수정이다.
연경당 안채 마루에 앉아 설명을 듣고 있다.
연경당 사랑채
연경당 안채
연경당 정문인 장락문을 나선다.
좌측으로 애련지와 불로문이 있는 곳이다.
좌측 아래로 서향각이 있는 부용지
부용지에 있는 서향각 지붕이다.
부용지가 담장 안쪽으로 조망된다.
창덕궁 숙장문을 나선다.
우측으로 인정문
인정문과 숙장문을 뒤돌아 본다. 우측으로 기다란 건물이 상서원이다.
창덕궁 진선문을 나서고
우측으로 규장각, 검서청이 있는 건물이다.
창덕궁 세계유산, 창덕궁 후원이 있기 때문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다고 한다.
금호문을 나서면서 오늘 조선왕조 5대궁궐 투어를 마친다.
창덕궁 돈화문, 자 밥 먹으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