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8 서울역 4번 출구로 나와서직진 숭례문으로 진행한다.08:31 숭례문 앞에 도착한다. 오늘은 숭례문을 기점으로 시계방향으로 돌아서 다시 이곳으로 내려 올 것이다.09:00에 개장을 하는 숭례문은 문이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다.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청계천과 만초천(蔓草川)을 가르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도성 8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며 서울의 얼굴 구실을 하였다. 남대문의 건축은 홍예(虹霓 Arch)와 문루 등 그 구조에 특별히 유의하였는데 1396년에 시작하여 1398년(태조 7) 2월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1448년(세종 30)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 남산과 인왕산의 지맥을 연결시켜 경복궁을 아늑하게 껴안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풍수지리설과 당시의 여론에 따라 다시 건축하였다. 이때의 숭례문이 오늘에 전하는 것인데 1479년(성종 10)에 중수되었다. 한편 1962년 개수 공사 때 세종과 성종 때 개축 또는 중수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숭례문의 현판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로 전하는데, 다른 도성문과 다르게 횡액(橫額)이 아니라 종액(縱額-세로로 써진 편액)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오행사상에 따른 것으로 예(禮)자는 오행의 화(火)에 해당하는 글자인 까닭에 불이 타오르는 형상에 따라 세워서 달았다고 한다. 혹은 한양의 조산(朝山)인 한강 건너의 관악산이 오행의 화(火)에 해당되어 그 불기운이 도성을 범접하게 되므로 숭례문의 현판을 세워 맞불로 도성을 보호하고자 했다는 전설이 있다.한양도성길 스탬프함이 있다.스탬프를 날인한다. 다른 팀원들을 위해 여분의 안내도를 함께 챙겨 간다.숭례문 좌측 대한상공회의소 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조선통신사의 길 표지석08:37 횡단보도를 건너 대한상공회의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횡단보도를 건너와 남지터에서 숭례문을 바라 본다.남지터 표지석, 서울특별시 중구 봉래동1가에 있는 숭례문 앞 연못터다.도성( 都 成 ) 숭례문 밖 바로 앞에 있던 남지( 南 池 )라는 연못터이다. 관악산의 강한 화기( 火 氣 )에 노출되어 있는 경복궁을 보호하기 위해 나라에서 만든 큰 연못으로, 장원서( 掌 苑 署 )에서 관리했다고 한다. 옛 지도를 보면 남대문(숭례문) 앞에 남지( 南 池 ), 서대문 북쪽에 서지( 西 池 ), 동대문 안쪽에 동지( 東 池 )라는 연못이 표시되어 있는데, 모두 연꽃이 피는 연못이었다 한다. 1629년 화가 이기룡이 원로들의 잔치를 묘사한 <남지기로회도 南 池 耆 老 會 圖 >에서 연꽃이 가득했던 남지를 확인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남지터[南池ㅡ]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다시 한번 횡단보도를 건너 중앙의 도로 옆 성곽을 따라 걷게 된다.08:39 각 지방의 지명이 나열되어 있는 표지석이 있다.위 지점에서 덕수궁 방향 직진길 진행이다.서울 한양도성 성곽이 복원되어 있다.서울 한양도성에 대한 일부 설명이 새겨져 있다.서울 한양도성 순성길, 돈의문 터 1.5Km 방향 진행된다.이른 아침이라 아직 사람이 없는 한적한 길이다.좌측으로 호암아트홀, 삼성생명 서소문빌딩이다. 이 빌딩은 소의문 터에 자리잡고 있다.08:42 소의문 터, 이곳에서 고가차도에 막혀 좌측으로 이동 후 횡단보도를 건넌 후 우측의 평안교회 앞으로 진행하게 된다.소의문 터 표지석소덕문은 서소문동에서 의주로로 넘어가는 길 마루턱에 위치한다. 1472년(성종3)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의 시호를 피하여 소의문으로 개칭하였다. 이 문은 도성 안 백성들이 죽어서 도성 서쪽으로 운구할 때 이용되는 문이었다. 서소문 밖에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시전의 하나인 칠패시전(七牌市廛)이 있어 발달하던 성업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1396년(태조5) 건축 당시에는 다른 성문과 같이 문루가 있었으나 언젠가 없어지고, 1743년(영조19) 다시 문루를 건축하였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서소문동이라는 지명만 남아 있다.도로 바닥에서는 한양도성 순성길 동판이 박혀 있다.위 지점에서 좌측 한양도성 돈의문 터 방향 진행이다.이곳에서 횡단보도를 건너게 된다.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린다.좌측 건너편으로 서소문역사공원 방향이다.횡단보도를 건너와 우측 한양도성 돈의문 터 방향 진행이다.08:50 평안교회 앞에서 좌측으로 꺽어 들어선다.평안교회 앞 이정표, 좌측 돈의문 터 방향 950M, 숭례문에서 1.0Km 진행해 온 것이다.위 지점의 옛 이름이 '수렛골'이었다라고 안내하고 있다.서울특별시 중구 순화동 일대의 옛 이름이다. 서소문동 서북쪽 전 배재고등학교 자리와 이화여자고등학교 부지 일부 지역을 가르 킨다. 차동이라고도 불렸다. 이곳에 숙박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들이 많이 모여든 것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숙종 비 인현왕후 민씨가 탄생한 곳이기도 한데, 민씨는 1667년 4월 23일 지금의 중앙일보사 사옥 맞은편 순화빌딩 주차장 터에서 태어나 1681년 15세 때 왕비로 책봉되었다. 20세까지 왕자를 낳지 못하여 숙종에게 장희빈을 후궁으로 천거하였으나 희빈의 모함으로 6년 동안 안국동 감고당에서 칩거하다가 1701년 8월 14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1761년 8월 영조가 직접 이곳에 찾아와 쓴 인현왕후탄강구기라는 글자를 새겨 인현왕후 추모비를 세웠는데, 이 비는 1936년 민씨 집안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일제강점기에는 상해임시정부의 국내 비밀 연락기관인 서울연통부가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수렛골(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평안교회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평안교회에서 다시 우측 골목으로 꺽여 들어간다.돈의문 터 방향 진행이다.전방의 아펜젤러기념공원 앞을 지나게 되고배재학당을 세운 최초의 외국인선교사 아펜젤러를 기리기 위한 공원이다.배재어린이공원으로 들어서고좌측 안내판은 주한 러시아대사관 내 한양도성 성벽 유적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뒤쪽이 주한 러시아대관이다.배재어린이 공원배재어린이공원을 나와 좌측으로 꺽이고, 우측이 신아빌딩이다.정동제일교회, 100주년 기념탑이다.정동로터리정동제일교회 전경정동제일교회에서 좌측으로 꺽이면서 정동길로 접어든다.국립정동극장정동 근대역사길 역사보행 탐방로 3코스, 우측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보면덕수궁 중명전이 있다.관람시간 09:30~, 아직은 개장이 안되었다.그래서 철문 사이로 전경만 담아 본다. 덕수궁( 德 壽 宮 ) 돌담길을 돌아 뒤쪽으로 가면 현재 정동극장이 있고, 그 골목으로 들어가면 '중명전( 重 明 殿 )'이 있다. 중명전은 원래 정동지역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에 속해 있다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이때 당호를 수옥헌이라 짓고, 주로 황실 도서관( King's Library )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 A.I. Sabatin )이 하였다.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중요한 현장이다. 특히,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대화재 이후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불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그 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곳도 바로 중명전이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한편 중명전은 1925년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소실된 뒤 다시 재건하여 외국인을 위한 사교클럽으로 주로 쓰이다가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다. 1977년 중명전은 다시 민간에 매각되었다. 그 후 2003년 정동극장에서 매입한 뒤 2006년 문화재청에 관리 전환하여, 2007년 2월 7일 사적 제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었다. 2009년 12월 복원을 거쳐 2010년 8월부터 전시관(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덕수궁 중명전)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중명전(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매일 출근시간에 걷는 길이다. 이 아침 걷는 길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 온다. 좌측 돌담장은 이화여고, 창덕여중이 나란히 있다.정동길 카페구 신아일보사 별관손탁 호텔 터좌측에 이화100주년기념관전방의 주한 캐나다대사관과 예원학원 정문 사이 우측 구 러시아공사관 안으로 들어가 본다.구 러시아공사관우측 골목길 따라 정동공원으로 올라 간다.09:02 정동근린공원정동근린공원 내에 있는 구 러시아공사관, 건물은 없고, 조형물만이 남아 있다.정동길을 지키고 있는 수령 520년의 회화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근대유산 1번지 정동좌측에 국토발전전시관우측 주한 캐나다대사관을 지나 돈의문 터로 진행한다.우측에 이화정동빌딩우측의 프란치스코교육회관어서각 터, 어서각(御書閣) 터는 왕의 어필(御筆)을 보관하던 어서각이 있던 곳이다. 일명 최규서어서각(崔奎瑞御書閣)은 영조가 영의정을 지낸 최규서(崔奎瑞, 1650~1735)에게 내린 어서(御書) 일사부정(一絲扶鼎) 편액을 보관하던 곳이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9에 해당한다. 어서각(御書閣)은 왕의 친필을 보관하던 곳으로, 전각(殿閣) 또는 어필각(御筆閣)이라고도 한다. 어서각 터는 그 어서각이 있던 곳이다. 서울 중구 정동길에 소재하고 있던 어서각은 최규서(崔奎瑞, 1650~1736)의 집터 안에 있던 것으로 영조(英祖)의 어필을 봉안하던 곳이다. 조선 숙종(肅宗)때 우의정을 지낸 최규서는 영조 즉위에 대한 불만을 품고 일어난 무신란(戊申亂)의 평정에 기여한 인물이다. 1728년(영조 4) 경기도 용인에 있던 그는 무신난(戊申亂)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서 80세의 노구를 이끌고 조정으로 달려와 그 사실을 알리고, 토난책(討難策)을 건의하였다. 무신난을 평정한 뒤 영조는 최규서의 공을 치하했는데, 최규서는 관련 내용이 문서에 기록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이에 영조는 한 가닥의 실올로 솥을 붙든다는 뜻의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어필을 내렸다. 이는 한 가닥의 절의(節義)로 나라를 붙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최규서는 이때 받은 영조의 어필을 자신의 집 근처에 전각을 지어 보관하였다. 그것이 바로 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자리에 있었던 어서각이다. 어서각은 1900년대에 접어들 무렵, 다른 건물이 들어서게 되자 현재의 위치인 최규서의 묘가 있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로 이전되었다. 원래 어서각이 있던 서울 중구 정동길에는 어서각 터 표지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어서각은 정면 4.94m, 측면 3.7m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내부에는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 쓰인 어필 편액(가로 140cm, 세로 55cm)과 최규서의 위패, 영정, 비망기 등이 보관되어 있다. 현재 안성향토유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09:07 돈의문 터 도착, 돈의문은 도성의 2차 공사가 끝나면서 다른 성문과 함께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경희궁 서쪽 언덕 지점에 위치하여 서전문(西箭門)이라 불리었다. 그러다가 1422년(세종 4) 2월에 도성을 고쳐 쌓게 되면서 서전문을 헐고 그보다 남쪽 지점에 새로 돈의문을 세웠다. 이후로 돈의문은 통칭 새문[新門]이라 불리게 되었다. 돈의문은 의주(義州) 국도의 관문으로 황해도와 평안도를 거쳐 중국으로 통하였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지금의 신문로 큰길과 정동에서 평동으로 통하는 길이 교차하는 마루턱에 위치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을미사변에 관련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서울특별시 중구에서 종로구로 넘어서게 된다.횡단보도를 건너면 돈이문박물관마을이 있다.돈의문 터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강북삼성병원돈의문박물관마을 우측으로 조금 이동하면 경희궁이 위치하고 있다.경희궁 흥화문, 경희궁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조선후기 왕의 피우( 避 寓 )를 위한 이궁으로 건립된 궁궐. 본래 경덕궁(慶德宮)으로 불렸다. 처음 창건 때는 유사시에 왕이 본궁을 떠나 피우(避寓)하는 이궁(離宮)으로 지어졌으나, 궁의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동궐인 창덕궁에 대하여 서궐이라 불리고 중요시되었다. 이 궁이 창건된 것은 1617년(광해군 9)으로, 당시 광해군은 창덕궁을 흉궁(凶宮)이라고 꺼려 길지에 새 궁을 세우고자 하여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하였다. 그런데 다시 정원군(定遠君)의 옛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궁을 세우고 경덕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 궁에 들지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결국 왕위는 정원군의 장남에게 이어졌으니 그가 곧 인조이다. 인조가 즉위하였을 때 창덕궁과 창경궁은 인조반정과 이괄(李适)의 난으로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에, 인조는 즉위 후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경덕궁에는 여러 왕들이 머물렀고, 이따금 왕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즉, 제19대 숙종은 이 궁의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났고, 승하한 것도 역시 이 궁의 융복전(隆福殿)에서였다. 제20대 경종 또한 경덕궁에서 태어났고, 제21대 영조는 여기서 승하하였다. 제22대 정조는 이 궁의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고, 제23대 순조가 회상전에서 승하하였으며, 제24대 헌종도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1760년(영조 36)경덕궁이던 궁명을 경희궁으로 고쳤는데, 그것은 원종의 시호가 경덕(敬德)이므로 음이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창건 때 정전 동궁, 침전, 제별당, 나인입주처 등 1,500칸에 달하는 건물이 있었다. 그 창건 공역은 1617년에 시작되어 4년 뒤인 1620년에 끝마쳤는데, 이 공사를 위하여 전국에서 공장(工匠)과 자재가 동원되었다. 그 뒤 1693년(숙종 19) 수리가 있었으며, 1829년(순조 29) 큰불이 나 회상전, 융복전, 흥정당(興政堂), 정시각, 집경당, 사현각 등 궁내 주요 전각의 절반 가량이 타 버렸다. 이듬해서궐영건도감(西闕營建都監)을 설치하여 소실된 건물을 재건하였다. 1860년(철종 11) 전각의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1902년(광무 6) 일부 전각의 수리가 있었다. 이렇게 궁궐의 하나로 중요시되던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건물이 대부분 철거되고, 이곳을 일본인들의 학교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다. 이미 1907년 궁의 서편에 일본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0년 궁이 국유로 편입되어 1915년 경성중학교가 궁터에 설립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궁내의 건물은 철거되어 없어지거나 다른 곳에 이전되기도 하였고, 궁역(宮域)도 주변에 각종 관사 등이 들어서면서 줄어들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이곳은 서울중고등학교로 사용되면서 주변 대지 일부가 매각되어 궁터가 더욱 줄어들었다. 1980년 6월 서울고등학교를 서초구로 이전하고 전체 부지는 민간기업에 매각하였다가, 1984년 이곳에 시민을 위한 공원을 조성하기로 하여 이듬해 궁터의 일부를 발굴조사하였으며, 1986년부터 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 『궁궐지(宮闕志)』에 따르면, 건물의 배치가 외전과 내전이 좌우에 나란히 놓이고 전체적으로 동향을 하고 있어, 정궁(正宮)인 경복궁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나타냈다. 즉, 경복궁은 남향으로 외전과 내전이 앞뒤에 구성되었는데 그것과 다르며, 또한 궁의 정문이 바른쪽 모퉁이에 있는 점도 특이하다. 이런 점은 처음 이궁으로 지어졌던 창덕궁에서도 보이는 현상으로, 의도적으로 경복궁보다는 격식을 덜 차린 결과로 보인다. 각 건물의 구성을 살펴보면, 우선 외전에 있어서 정전(正殿)인 숭정전(崇政殿)은 궁의 서쪽에 동향하였고, 주위는 행각으로 둘러싸고 사방에 문을 두었다. 숭정전 뒤에는 후전인 자정전(資政殿)이 있고, 주변에 수어소(守御所)인 태령전(泰寧殿)이 있다. 숭정전의 오른편, 즉 북쪽으로는 왕이 신료(臣僚)들을 접견하고 강연(講筵)을 여는 곳인 흥정당이 있고, 주변에 왕이 독서하는 곳으로 존현각(尊賢閣), 석음각(惜陰閣)이 있다. 이상 외전을 구성하는 중심 전각들의 우편에 내전이 있는데, 그 정침이 회상전이다. 그 서쪽에 융복전, 동서에 별실이 있고 주변에 연못과 죽정(竹亭)이 있다. 융복전의 동편에는 대비를 모시는 장락전(長樂殿)이 있고, 주변에 용비(龍飛), 봉상(鳳翔)이라는 누각과 연못이 있으며, 동편에 연회장소인 광명전(光明殿)이 있다. 궁의 외부 출입문은 모두 다섯인데, 정문은 동북 모서리에 있는 흥화문(興化門)이다. 결국, 경희궁은 정문이 동북 모서리에 있어서, 정문을 들어서서 내전 앞을 지나 서쪽 끝의 외전 정전 일곽에 도달하게 되는 특수한 배치와 구성을 보여 준다. 경희궁에는 수많은 전각들이 들어서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궁 자리에 일본인 중학교를 세우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지고, 일부는 다른 곳에 이건되어 지금까지 건물이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우선, 현존하는 건물을 보면 정전인 숭정전의 정문인 흥화문,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黃鶴亭) 등이 있다. 숭정전은 1926년 조계사(曹溪寺)에 매각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에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을 한 주심포양식의 건물이다. 1618년에 창건된 이래 건물 자체가 재해를 입은 일은 없었으므로, 조선 중기 건축양식을 간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포는 외부 이출목이고, 내부는 양봉(梁奉)형식으로 보를 받치고 있으며, 주칸에 화반이 있어 장여를 받쳤다. 흥화문은 역시 1618년에 세워진 건물로 창건 때의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왔으나, 1932년에 이전되어 일본인 절인 박문사(博文寺)의 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 경희궁복원계획의 일환으로 지금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우진각 기와지붕이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정문이 모두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하여 이 건물만은 단층으로 되었는데, 그 이유는 궁의 창건 때 이 궁이 피우처로 마련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학정은 1890년(고종 27) 회상전의 북쪽에 지었던 정자로, 1923년 민간인에 매각되었다가 현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의 사직공원 뒤편에 옮겨져 있다. 본래 무인들의 궁술 연습장으로 세운 건물인데 갑오경장 이래 궁술이 폐지되는 바람에 민간에서 유기화(遊技化)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궁내에 세웠던 건물이다. 이 밖에 경희궁의 중요한 건물로는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등이 있었다. 이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자취를 잃었는데,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을 통하여 그 규모만을 살펴보면, 대내(大內)의 정전인 회상전은 정면 7칸의 팔작기와지붕 건물로, 창경궁의 통명전과 같이 지붕에 용마루를 두지 않은 건물이었다. 융복전은 정면 6칸으로, 왼쪽에 건물이 연접되어 ㄱ자형 평면을 이루었다. 그리고 집경당, 흥정당은 각각 정면 5칸, 정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두 건물 모두 일종의 누각과 같이 건물 일부에 누하주(樓下柱)가 있고 높은 계단을 갖추었다. 현재 궁터에는 용비천(龍飛泉)이라는 샘터가 남아 있고, 숭정전 등 주요 전각의 기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지역은 한동안 학교로 이용되어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주변의 조경이 변모되고 지하 방공시설이 구축되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옛 건물의 기단이 일부 남아 있고 전체적으로 궁궐의 지형이 잘 남아 있으며,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아직도 궁궐의 자취를 상당히 간직하고 있다. 경희궁은 일명 야주개 대궐[夜照峴大闕]로 불렸는데, 그것은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었고, 글씨의 광채가 밤에도 훤히 비추었다고 해서 이 일대를 야주개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희궁[慶熙宮]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오늘은 경희궁은 패스하고 좌측의 돈의문박물관마을 골목으로 들어선다.옛 모습을 재현해 놓은 돈의문박물관마을좌측 아래 건너편이 정동길이다.좌측의 건물 안쪽에 스탬프함이 있다.돈의문 스탬프를 날인한다.강북삼성병원 내에 있는 서울 경교장으로 향한다.서울 경교장서울 경교장 :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백범 김구( 金 九 )가 1945년 11월부터 1949년 6월 26일까지 사용했던 개인 사저. 사적 제465호이다. 2001년 4월 6일 서울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6월 13일에 사적 제465호로 승격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에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하였던 역사적 장소이다. 이승만 의 이화장( 梨 花 莊 ), 김규식 의 삼청장( 三 淸 莊 )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건국 활동의 중심을 이룬 3대 요람이다. 1938년 금광으로 돈을 번 최창학( 崔 昌 學 )이 건축면적 396.69㎡, 연면적 945.45㎡(지하1층, 지상2층)규모로 지었으며, 1930년대 건축술을 잘 보여주고 있다. 원래 이름은 죽첨장( 竹 添 莊 )이었다. 8.15광복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는데, 김구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경교[ 京 橋 ;경구교( 京 口 橋 )의 약칭]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 건물은 단아한 2층 양관으로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다우며, 1층의 좌우창을 원형으로 돌출시켰고, 그 상부를 의장의 중심체로 하였다. 현관 2층부에는 6개의 붙임 원주를 사용하여 5개의 들임 아치창을 냈다. 김구가 반탁, 건국, 통일 운동을 주도할 때에는 흔히 '서대문 경교장'이라고 일컬었으며,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이용되었다. 또한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집무실에서 안두희( 安 斗 熙 )의 흉탄에 의해 서거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다시, 주한 타이완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에는 미국 특수부대가 주둔하는 등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1967년 삼성재단에서 매입하여 강북삼성병원 본관으로 사용되어왔다. 이후 서울시에서 소유는 그대로 두되 전체 공간을 복원하기로 합의해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당시의 모습대로 재현하였다. 이는 2013년 3월 2일부터 시민에 게 개방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서울 경교장[서울 京橋莊]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09:18 돈의문박물관마을을 떠나 인왕산으로 진행한다.소공원을 지나고요즘 흔하게 볼 수 있는 이팝나무우측에 서울특별시교육청09:21 국립기상박물관, 아직 약속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다. 그래서 일부러 주변을 둘러보면서 천천히 진행한다. 우측 안쪽으로 들어가 본다.국립기상박물관으로 올라선다.국립기상박물관, 옛 기상청이다.송월동 1번지 기상청 옛터서울기상관측소 안내판국립기상박물관 전경이곳에서 인왕산을 조망해 볼 수 있다.인왕산을 당겨 본다.단풍나무 계절관측목옛 서울의 단풍 시기를 정하는 표준이었다고 한다.09:29 국립기상박물관을 나와 인왕산으로 향한다.성곽길에 합류된다.월암근린공원으로 올라 선다.인왕산 정상 2.1Km, 행촌성곽마을이라고 표기되어 있다.우측에 아름드리 나무가 조금전 국립기상박물관에서 봤던 단풍나무이다. 가을철에 보면 정말 예쁜 단풍이 피어난다.우측 나무계단이 국립기상박물관에서 곧장 내려 올 수 있으나, 문을 굳게 닫아 사용하지 않고 있다.호젓한 공원을 걷는다.어니스트 베델 집터,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항일 언론활동을 도왔던 인물이라고 한다.잠시 주택단지로 들어선다. 골목에서 우측으로 진행된다.갈림길에서도 표지판 따라 우측 진행이곳에서는 다시 좌측방향 진행표지판을 보면서 진행한다. 사직터널 상단부를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09:38-10:15 이곳 인왕산 들머리 도착, 독립문에서 10:00 출발해 올라 올 팀을 기다리면서 근처 편의점에 들러 청운대 가서 먹을 아이스크림을 다량구입 배낭에 챙긴다.인왕산 입구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한참을 기다린다.10:15 단체팀이 도착하고, 본격적으로 인왕산 정상을 향해 이동을 시작한다.햇볕이 예사롭지 않다.성곽길 따라 걷는다.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왕산 성곽길을 오르내리고 있다.합류한 팀들이 앞서 걷고 있다.10:18 인왕산 정상으로 향해 오른다.햇빛이 따갑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다.사람들이 줄지어 오르내리고 있다.범바위로 올라서고범바위에서 뒤를 내려다 본다.오름길 우측으로 경복궁 방향이다.오늘 가장 마지막에 오르게 될 남산이 저 멀리 있다.진행길 좌측으로 홍제동 방향범바위에서 인왕산 정상 0.45Km, 많은 인파로 정체가 유발되고 있다.좌측의 인왕산과 우측 저 멀리 북악산이다.인왕산 정상부르르 담아 본다.인왕천약수터갈림길, 정상 0.4Km급된비알길 오름이 이어진다.정체가 심해 대기하면서 뒤를 내려다 본다.좌측 건너편으로 안산이다.대기하는 틈을 타서 다시 뒤를 내려다 본다.파노라마로 담아 보기도 한다.옥개석을 지나고10:46 인왕산 정상 도착, 사람들이 많아 인증은 패스하고 곧장 창의문으로 향한다.2021년 2월 28일 당시 사진으로 대체한다. 창의문 1.8Km, 돈의문 터에서 2.5Km곧장 북악산을 보면서 내려 선다.10:51 기차바위갈림길직진 창의문(자하문) 1.4Km 방향 진행이다.우측 아래로 지나 온 길을 조망해 본다.성곽길 급경사 내리막길을 지나 창의문으로 향한다.11:10 창의문로에 내려선 후 횡단보도를 건넌다.11:12 창의문(자하문), 창의문은 의로움을 표창한다는 뜻으로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불렸고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도성을 축조할 때 함께 축조되었는데, 1413년(태종13) 지리도참설에 따라 일시적으로 문이 닫히기도 했다. 그러나 1422년(세종 4) 숙청문과 함께 군인의 출입문으로 하였고, 궁궐의 담장 축조나 국가의 큰 공사가 있을 때 일시 열어 통행하였다. 1623년에는 인조반정의 반정군(反正軍)이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였다가 세검정을 거쳐 이 창의문을 열고 도성에 들어와 광해군을 쫓아냄으로써 인조 정권이 창출되었다. 1741년(영조 17) 성문과 문루를 개수하면서 인조반정의 반정공신 1등에서 3등까지의 공신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었으며,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창의문은 서울 성곽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완형을 지니고 있으며 지금도 성곽의 일부가 연결되어 있다. 창의문 구조의 특징으로, 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네의 형상과 같아 그 기세를 제압하고자 지네와 상극인 닭의 모형을 나무로 만들어 추녀에 매달아 놓았다.창의문 현판창의문 안내소, 잠깐 화장실로 들르고 음료도 마신다.급된비알 계단길이 기다리고 있다.11:25 돌고래쉼터, 백악마루 300M 구간도 장난이 아니다.사람들이 줄지어 오르고 있다.11:33 백악쉼터11:39 백악마루갈림길, 우측 백악산 정상을 다녀 온다.11:41 백악산(북악산) 정상김신조 루트에 있는 총알 박힌 자국이다.11:47 청운대 도착, 이곳에서 배낭에 담아 온 아이스크림을 풀어 놓는다. 사람들이 환호를 한다.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간다.청운대에서 조망12:03 백악 곡성갈림길 통과오늘 백악 곡성을 그냥 패스, 우측 숙정문 700M 방향 곧장 진행이다.12:10 숙정문(북대문) 통과, 다들 점심 먹을 생각에 그냥 걷기만 한다.숙청문은 한양의 주산(主山)인 북악의 동쪽 마루턱에 위치하였으나 그 규모는 대문의 형식을 갖추지 못하고 소문(小門)의 규모였으며 오랫동안 문루마저 갖추지 못하였다. 숙청문의 원래 자리는 지금 자리의 약간 서쪽에 위치하였었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옮겨졌다. 숙청문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1413년(태종 13)에 폐문되었는데, 즉 북쪽은 음(陰)에 해당되어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가 번성하여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놀아나 풍기가 어지러워지기 때문에 문을 꼭꼭 닫아둔다고 하였다. 숙청문은 위치상 통행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고, 단지 장마가 지면 비 그치기를 기원하는 영제(禜祭), 즉 기청제(祈晴祭)를 여기에서 거행하였다. 또 예종 때부터는 가뭄이 들면 양기가 많은 남대문을 닫고 음기 서린 북대문을 열어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냈다. 숙청문은 중종 이후 모든 기록에 숙정문(肅靖門)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 새로 복원한 문루에도 肅靖門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숙정문 현판숙정문에서 숙정문을 통해 좌측으로 나가면 안된다. 그럴 경우 성곽길을 벗어나게 된다. 말바위안내소(화장실) 250M 직진해야 한다.숙정문에서 성곽길 따라 말바위안내소로 향한다.12:15 말바위안내소 통과, 이곳에서 숙정문 스템프 날인 하고, 창의문 안내소에서 배부 받았던 패찰을 반납하게 된다. 화장실도 있으니, 용무가 있으면 이곳에서 해결해야 한다.12:19 말바위전망대 통과, 계단을 통해 성곽길 상단부 전망대로 올라서게 된다.계단을 올라선 후 우리는 우측 와룡공원 560M로 빠져야 한다. 직진을 할 경우 삼청공원으로 진행되어 성곽길을 벗어나게 된다. 반드시 우측 와룡공원으로 빠져야 한다.와룡공원 방향 우측으로 빠져 성곽길을 넘어가게 된다.전망대에서 조망되는 삼청각 방향살짝 우측으로 성북구 성북동이다.계단을 내려선 후 다시 우측 와룡공원으로 빠지게 된다.와룡공원 542M, 한양도성 순성길 방향 우틀이다.와룡공원 방향으로 올라서면12:25 다시 성곽길에 합류하여 걷게 된다.12:29 성북동갈림길을 지나고12:30 와룡공원 입구에서 우리는 좌측 성곽 바깥길을 걷는다. 안쪽 공원으로 걸어도 상관은 없다. 잠시 후 다시 만나게 된다.성곽 바깥길 한양도성(혜화문,낙산) 1800M 방향 진행이다.성곽 바깥을 걸어 내려간다.성곽길 우수조망지점을 지난다.12:33 성곽길외부를 걷다가 암문을 만나 우측 와룡공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우측으로 들어가지 않고 점심식사를 위해 좌측 성북동으로 빠진다. 나중에 성북쉼터에서 다시 합류하게 된다.위 지점에서 우측 혜화문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점심식사를 위해 좌측 성북동 북정마을로 빠진다.마을길로 내려선다.도로 따라 내려간다.12:39~13:15 오늘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간다.식당 앞 사거리13:15 맛있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출발이다. 우리가 식사를 했던 집과 서로 원조다툼을 하고 있다고 한다.13:16 성곽길과 만나는 성북쉼터에서 다시 성곽길을 이어간다.우리가 점심식사를 위해 성곽길을 이탈했던 루트(빨간색)이다.성북쉼터 입구혜화문 850M13:17 경신중,고교 성곽길 따라 진행된다.아직도 성벽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우측의 성북교회도 성곽길 위에 세워져 있다.13:26 혜화문으로 올라 선다.혜화문 성곽길13:28 혜화문홍화문((弘化門)은 혜화동에서 삼선동으로 뚫린 길 마루턱에 자리 잡아 도성에서 함경도 등 북방과 직결되는 관문이었다. 1484년(성종 15) 창경궁이 완공되어 그 정문을 홍화문이라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년(중종6)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혜화문은 도성의 소문 가운데 하나였지만 대문의 구실을 하였다. 즉 경원가도(京元街道)가 여기서 연결되어 있었고,북대문인 숙청문(肅淸門, 후에 肅靖門)이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행하였다. 그리고 여진(女眞)의 사신이 조공하기 위하여 한양에 입성할 때 이용하던 문이기도 하다. 처음 건립하였을 때의 문루는 언젠가 없어지고, 1744년(영조 20) 어영청( 禦營廳)에 명하여 문루를 건축하였다. 이후 일제의 도시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문루는1928년에 헐리고, 홍예와 석문마저 1939년에 사라진 것을 1994년 길 마루턱 북쪽에 복원하였다.혜화문 현판한양도성 낙산지역으로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