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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일상속으로

전주 한옥마을(경기전,전주사고,전동성당,오목대,이목대,풍남문)

전주 한옥마을

2018년 7월 7일(토)


 

 

1977년 한옥마을 보존지구로 지정된 뒤 전통한옥지구·전통문화지역·전통문화구역·전통문화특구 등으로 불리다가, 2002년 10월 '전주시 공공시설 등의 명칭 제정위원회'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전주시 완산구 교동()·풍남동() 일대 7만 6,320평에 700여 채의 전통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성곽을 헐고 도로를 뚫은 뒤 일본 상인들이 성 안으로 들어오자, 이에 대한 반발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현재까지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문화공간으로는
판소리·춤·타악 등 전통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전주전통문화센터, 막걸리·청주의 제조과정 관람과 시음까지 할 수 있는 전주전통술박물관, 숙박을 하면서 온돌대청 마루 등 한옥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전주한옥생활체험관, 전통 공예품을 전시하는 전주공예품전시관 및 명품관 등이 있다.

또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殿:사적 339),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연회를 열었던 오목대와 이목대,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인 전주 전동성당, 전주향교 등의 문화유적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주한옥마을 [全州韓屋─] (두산백과)

 

 

절기상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다는 '소서'

가을과 같은 파란 하늘이 더 없이 맑고 싱그럽다.


 



▼ 전주 한옥마을 풍경길

한옥호텔 '나비잠'









 

▼ 전주 전동성당 [殿]


 

 

전북 전주시 완산구(完山區) 전동(殿洞)에 있는, 1914년에 준공된 서양식 근대건축.

사적 제288호. 건축면적 약 624 m2.  천주교 신자의 순교지이기도 한 이 곳에 1889년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보드네(한자명 ) 신부가 성당 부지를 매입하고, 1908년 V.L.프와넬(한자명 ) 신부의 설계로 건물이 완공되었다. 호남지방의 서양식 근대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의 하나로, 평지의 성당으로는 대구 계산동() 성당과 쌍벽을 이룬다.

화강석을 기단()으로 사용한 붉은벽돌 건물로서, 본당과 측랑()의 평면 구성에다 내부는 둥근 천장으로 되어 있다. 중앙의 종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작은 종탑들은 조화로운 입체감을 창출, 건물의 상승감을 더해 준다. 종머리는 로마네스크의 주조(調)에 비잔틴풍()이 가미되어 있어 건물 본체와 잘 어울린다. 1988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주 전동성당 [全州殿洞聖堂] (두산백과)

 

 









 

▼ 경기전 하마비


 



 

▼ 전주 경기전 [ 殿]


1991년 1월 9일 사적 제339호로 지정되었다. 1410년(태종 11)에 임금은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하는 전각을 짓고 어용전(殿)이라 하였다. 경기전은 왕조의 발상지라 여기는 전주에 세운 전각으로, 세종 때 붙인 이름이다.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14년(광해군6)에 중건하였다. 보호면적은 49,590㎡이다.

경기전의 경역은 정전(殿)과 조경묘()로 나뉜다. 

정전(보물 1578)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보물 931)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다. 지대석()과 면석() 및
갑석()을 갖춘 기단 위에 세운 다포계() 형식의 맞배집으로, 그 전면 가운데에는 1칸 규모의 기단을 돌출시켜 쌓고 그 위에 첨각()을 세워 배례청을 시설했다. 마치 능침()의 정자각()과 같은 형상이다. 이 첨각 기단의 3면에 벽돌을 깐 보도를 연결하였다.

조경묘는 정전 북쪽에 있다. 태조의 22대조이며 전주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 이한() 부부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1771년(영조 47)에 지은 것이다.

이곳에 남아 있는 경기전 조경묘 도형의 그림을 보면 지금은 없어진 전사청() ·동재 ·서재 ·수복방 ·제기고 등 부속건물들과 별전이 따로 있는 광범위한 성역이었다. 전주시가 관리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주 경기전 [全州 慶基殿] (두산백과)

 




















▼ 전주사고로 나가는 문



 

 

전주사고포쇄형지안

[]


필사본. 2책. 규장각도서. 이 사고의 실록각()에는 조선 국초()로부터 선조 임진왜란 때까지의 역대 실록이 장치()되었기 때문에 3년마다 예문관() 관원을 보내서 사책()을 포쇄하고 그 서목() 및 장치된 상태를 보고하게 하였다. 지금 전하는 이 형지안은 다음과 같다. ① 선조 21년 무자 전주사고 포쇄형지안() 1책. 1588년. ② 선조 24년 신묘 전주사고 포쇄형지안() 1책. 1591년.

[네이버 지식백과] 전주사고포쇄형지안 [全州史庫曝曬形止案] (두산백과)

 


 






 

▼ 어진박물관


 























▼ 오목대 & 이목대 입구












▼ 이목대




 

 

▼ 오목대

 

오목대는 전라북도 전주시의 완산구 풍남동에 위치한 정자이다.

1380년(고려 우왕 6)에 남원의 황산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돌아가던 이성계 장군이 이곳에서 승전 잔치를 베푼 곳이다.

그 후 조선왕조를 개국하고 나서 여기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오목대라 했다.


 





 

▼ 이목대.오목대

 

1974년 9월 24일 전라북도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오목대는 1380년(우왕 6) 삼도순찰사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경하는 도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으로 1900년(
고종 37) 고종이 친필로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가 새겨진 비가 세워졌다.

경기전(殿)의 남동쪽 500m쯤 떨어진 곳,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하는데, 옛날에는 동쪽의 승암산에서 오목대까지 산이 이어져 있었으나 전라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맥이 끊겼다. 오목대에서 육교 건너편으로 70m쯤 위쪽으로 가면 승암산 발치에 이목대가 자리잡고 있다.

이목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의 유허()로서 시조 이한() 때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
용비어천가》에도 묘사되어 있다. 이목대에도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구거유지()’가 새겨진 비가 오목대와 동시에 세워졌다. 오목대와 이목대는 모두 오래전부터 전주 시민의 휴식 공간이 되어 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목대이목대 [梧木臺梨木臺] (두산백과)


 

▼ 이목대






















 

 

 

 

전주 풍남문

[ ]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08호로 지정되었다.

전주읍성의 남문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으며, 1734년 영조의 명으로 개축되었다. 176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다시 지으면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1층이 정면 3칸, 측면 3칸, 2층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층문루()의
팔작지붕이다. 1768년(영조 44)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일반적인 성문건축과 같이 성벽의 일부를 형성하는 석축기대() 중앙에 홍예문이 있으며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다. 하층 내부에 앞뒤 두 줄로 4개씩 세운 고주()가 그대로 연장해서 상층의 변주()가 되었으며 이러한 기둥 배치는 한국 문루건축에서는 드문 형식이다.

공포()는 주심포()집과 같이 기둥 위에만 배치되었으나 그 짜임은 다포집 계통의 솜씨를 따르고 있으며 우설()도 역시 다포집과 같은 형태이다. 공포와 공포 사이의 창방() 위에는 화반()을 배치하였으며 이는 주심포집에서 변천된 익공()집 건축에서 시작되었다. 하층 전후면의 중앙 기둥 위에 위치한 공포 하부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였으나 이러한 장식적인 면은 조선 후기의 건축일수록 더욱 많아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주 풍남문 [全州 豊南門] (두산백과)

 

 

 

 

 

 

 

▼ 전동성당 앞 카페에 앉아 여유를 만끽한다.